3·1독립운동과 봉오동전투
1919년 2월 1일 중국 길림성에서 대한독립선언이,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이, 3월 1일 서울에서 기미독립선언이 선포되었다. 당시 독립선언은 들풀처럼 일어나 국내를 넘어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거족적으로 선포되었다. 이렇게 고취된 독립정신이 결집되어 연해주와 중국, 그리고 서울에서 임시정부가 결성되었고, 이후 세 지역의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만주와 노령에서의 조선독립운동소요요도(1919. 5. 15)
1919년 5월 당시 일제 조선헌병사령부에서 조사한 간도와 연해주에서 일어난 독립선언식 현황.
서간도에서 북간도, 연해주 전역에 걸쳐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료는 크게 확대해야 각 지역별 상황이 보입니다)
화룡현, 연길현, 왕청현, 훈춘현 부분을 확대한 모습
(지역별로 날짜, 참석자 숫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자주독립의 열망이 고조되던 1919년 당시 북간도 봉오동에는 정식 군사훈련을 받고 신형무기로 완전무장하고 정규군 편제를 갖춘 독립군부대 <도독부>가 존재하고 있었다. 최운산 장군이 1912년 창설한 사병 무장독립군부대다.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919년 4월 최운산 장군은 자신이 운영하던 <도독부>를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로 재창설했다.

<대한군무도독부>는 1910년경부터 훈련·양성된 정예군인 670명 규모의 완전무장을 갖춘 부대였다. 최씨 형제들이 모두 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첫째 최진동이 사령관을, 둘째 최운산이 참모장을 셋째 최치흥은 작전 참모를 맡아 지휘부를 구성했고, 나이 어린 넷째 명철은 뒤에서 형님들을 도왔다.
1920년, 대한민국 수립 2년차를 맞은 임시정부는 ‘독립전쟁 원년의 해’를 선포하고 1920년 1월 ‘국무원포고1호’를 공표했다. 애국청년들이 독립군에 지원해줄 것을 촉구하는 한편 간도와 연해주 일대의 제 독립군부대의 통합을 요청한 것이다.

이미 1919년 후반 서일 총재와 함께 자신의 소유지 서대파에 북로군정서를 세운 최운산 장군은 이런 임시정부의 계획과 요구에 발맞추어 북간도 무장독립운동단체 통합에 필요한 군자금을 준비했다. 자신의 소유지를 각 부대의 주둔지로 내어 놓고 무기와 식량, 군복을 제공했다. 김성녀 여사도 봉오동의 부녀자들과 8대의 재봉틀로 군복을 쉬지 않고 만들었다.
봉오동 독립전쟁 승전 후 기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군의 사진.
모두 정식 군복을 입고 신형무기인 소총을 어깨에 메고 탄창을 허리에 두르고 있다.
기미년 독립선언 이후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목숨을 바쳐 독립군이 되겠다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들어왔다. 깨어난 민족정신으로 무장투쟁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갑자기 늘어난 지원자들을 정예독립군으로 양성하려면 제대로 된 군사훈련이 필요하다. 최운산 장군은 십리평을 주둔지로 제공하고 군자금을 지원해 6개월 코스의 군사훈련기관 <사관연성소>를 설립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한 체코군의 무기가
봉오동의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의 무기가 되었다.
기미년 독립선언 이후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목숨을 바쳐 독립군이 되겠다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들어왔다. 깨어난 민족정신으로 무장투쟁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갑자기 늘어난 지원자들을 정예독립군으로 양성하려면 제대로 된 군사훈련이 필요하다. 최운산 장군은 십리평을 주둔지로 제공하고 군자금을 지원해 6개월 코스의 군사훈련기관 <사관연성소>를 설립했다.
봉오동의 대한군무도독부(사령관 최진동)의 무기 구입을 보고한 일제 문서
당시 새로 구입한 무기의 규모만으로도 봉오동에 모였던 독립군의 숫자를 추측할 수 있다.일제는 1919년 기록에서 <대한군무도독부>는 670명의 무장한 독립군이라고 표현했다. 이미 완전무장한 <대한군무도독부>와 <북로군정서>를 비롯해 통합에 참여한 <광복단>, <의군단>, <신민단>, <국민회>, 그리고 <맹호단>을 비롯한 북간도의 독립군 제 단체들, 훈련 중인 사관연성소의 훈련병, 그리고 활발하게 교류하던 연해주의 독립군들이 봉오동으로 합류해 수천 명의 독립군이 봉오동 부근에 모였다. 명실 공히 대군단이 결성되었고 최운산 장군의 결단과 재력으로 그들에게 꼭 필요한 무기가 공급된 것이다. 당시 <대한북로독군부>는 수천 정의 소총과 수십 정의 기관총, 대포 10여 문과 권총 수백 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북간도의 독립군들이 대한민국2년(1920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통합논의에 들어가 5월 11일 6개 단체가 18개항의 ‘재북간도각기관협의회서약서’를 발표했고, 5월 19일 <대한군무도독부>와 <국민회>가 영구통합에 서명하여 <대한북로독군부>가 창설되었다. 본격적인 전쟁 준비였다.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는 수시로 두만강을 건너 국내진공작전을 실행하는 한편 일본군의 습격에 대비했다. 봉오동에서 10년 이상 훈련 양성된 실전 경험이 많은 정예군 <대한군무도독부>가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중심에서 작전을 실행했다.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된 대한민국2년 1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이 시도한 60여 차례의 국내진공작전의 대부분은 <대한군무도독부>에 의한 것이다.
대한민국2년(1920년) 5월 19일 작성한 대한군무도독부와 대한국민회군의 통합문서
이렇게 수천의 독립군이 봉오동에 모여 국내 진공작전을 거듭하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 봉오동 토벌계획을 세웠고 두만강을 건너와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대한북로독군부>는 일본군의 공격을 예상하고 이미 모든 전쟁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아시아 최강의 군대로 인정받던 일본군과의 정규전에서 우리 독립군이 승리한다는 것은 운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최운산 장군과 형제들은 무기를 구입하고 독립군을 모집해 군사력을 갖추었다. 장기간 다져진 첩보력으로 일본군의 상황을 파악했고, 우리 독립군의 전력을 충분히 보충하며 전쟁에 대비했다.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의 승리는 봉오동을 독립군기지로 만들고 10년 이상 독립군을 양성한 최운산 장군의 집념과 준비, 그리고 3.1 독립선언 이후 높아진 독립 정신과 무장투쟁의 열기에 대한민국의 독립군이 되어 목숨을 걸고 싸우기로 결정한 수많은 애국청년들의 도전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