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에 가다
봉함경북도 온성에서 두만강만 건너면 봉오동이다.
북간도 무장독립군의 근거지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지역으로 함경북도 온성과 다리로 연결되는 강변도시 도문에 인접해 있다. 황량한 만주 벌판이 어디쯤이 아니라 독립군이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두만강만 건너면 만날 수 있었던 곳이다. 강변 곳곳에 두만강을 지키는 무장한 장정들이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살펴보고 독립군을 자원하는 젊은이들은 봉오동으로 데려가는 역할을 했다. 이는 실제 지도로 살펴보면 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데, 구글 지도로 봉오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함경북도 온성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바로 봉오동 일대다
검은 색으로 보이는 부분이 1980년 경 건설된 봉오저수지다.
이 길을 따라 더 들어가면 본부가 있던 중촌이, 더 들어가면 산으로 둘러싸인 상촌이 나온다. 이곳이 봉오동 독립전쟁의 전투현장이다
봉오동을 중심으로 국경 도시 도문과 석현, 서대파(북로군정서 주둔지) 십리평(사관연성소 주둔지), 양수천자를 비롯해 두만강변의 왕청현 일대가 최운산 장군의 소유지였다.
이 중 봉오동과 가까운 도시 석현은 체코군의 무기를 구입하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20년 1월 급매로 5만원에 팔았던 곳이다.이 땅에 석현 지역의 2/3을 차지하는 대규모 제지회사가 세워졌고 석현의 주민들은 대부분 이 제지공장의 직원으로 일했다.
지금은 한국에 살고 있는 최운산 장군의 동생 최치흥의 손자, 손녀들도 이 공장에서 일했다. 그들은 최치흥 장군의 독립운동 역사도, 자신들이 일하는 제지회사 터가 큰할아버지 최운산이 군자금 마련을 위해 팔았다는 것도 당시엔 몰랐다고 한다.지금은 기찻길만 남아있지만 예전에 석현은 기차역이 있는 도시였다. 지금은 제지공장의 가동이 멈추었지만 아직 회사 건물 등은 남아있다
지금은 운영을 중지한 석현 제지회사 정문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는 제지공장 측면에 있는 출입문에서 최운산 장군의 손녀들
봉오동 수남촌은 봉오동 입구에 있는 조선족 전통마을이다. 1980년 경 봉오동 입구를 막아 대형 댐을 건설하여 원래 봉오동 주민들이 살던 상촌, 중촌, 하촌 세 마을의 주민들은 모두 흩어졌다. 북경이나 광주 등 중국 본토 대도시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고 근처 석현이나 수남촌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있다.
봉오동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봉오저수지 정문이 세워져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봉오동전투 승전 기념비가 있고 그 뒤로 올라가면 대형 댐이 있다.
댐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왼편에 봉오동 독립전쟁 승전비가 있다.
댐 상부
물이 맑은 봉오동의 입구를 막아 댐을 건설했다.
봉오동 안으로 들어가 저수지 시작점에서 바라다본 댐 상부, 거리가 멀어 잘 보이지 않았다.
이 댐이 건설된 후 이 곳은 수자원 보호 지역으로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이 되었고, 오랜 세월 주민들의 발걸음이 끊어진 전투현장과 봉오동 마을은 서서히 황폐화 되었다. 봉오동 일대를 살펴보면 지도에서 3km 정도 길고 검은 색으로 보이는 부분이 저수지다. 이 댐이 생긴 1980년 이후 중국과 수교가 없었던 긴 세월 동안, 그리고 2015년 최운산 장군의 후손들이 봉오동을 찾아 직접 전투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기까지 봉오동 독립전쟁의 현장은 모두 이 댐 아래 잠겨있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
댐이 생기면서 입구에서 가까운 하촌 마을이 수몰된 것이 봉오동 독립전쟁의 현장이 모두 물에 잠겼다고 왜곡된 것이다. 직접 답사가 어려웠던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과 북간도의 무장투쟁사는 왜곡된 채로 학계에서 연구되고 전투현장 답사가 진행되면서 왜곡된 역사가 고착화된 것이다. 무장독립군기지 봉오동은 상촌, 중촌, 하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글로 살펴본 봉오동 일대: 상촌, 중촌, 하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촌이 당시 전투현장이다. 중촌에 대한군무도독부 본부가 있었다.
하촌 마을은 댐이 건설될 때 수몰되었다.
봉오동 산으로 들어가는 넓은 길을 따라 10km 정도 들어가면 전투현장이 나온다.
상촌의 연병장, 격렬했던 전투의 현장이 풀이 무성히 자라있다.
봉오동전투 현장은 봉오동 입구에 건설된 댐에서 10km 정도 더 숲으로 들어가서 산에 올라야 만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기념비에서 차로 20분 정도 들어가면 <대한군무도독부> 본부가 있던 중촌이 나온다. 구글 지도로 중촌 지역을 살펴보면 최운산 장군이 1915년에 봉오동 숲을 개간해 만든 대규모 연병장과 연병장을 건설할 때 벌목한 나무로 건축한 대형 막사가 있던 터를 찾아볼 수 있다. 이 본부 일대에 대규모 토성을 쌓았다. 2016년 최운산 장군의 후손들과 역사학자들이 봉오동의 전투현장을 답사하였다. 우리 독립군이 100년 전 파놓은 참호가 봉오동 산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김성녀 여사가 사용했던 대형맷돌도 현장에 남아있다
봉오동 독립전쟁의 현장, 대한군무도독부 독립군이 1920년 5월에 파놓은 참호, 산 능선을 따라 길게 만들었다.
100년 간 쌓인 낙엽이 검은 흙이 되었고 그 위에 낙엽이 계속 쌓이고 있다.
100년 동안 쌓인 낙엽이 가득한 참호에 발이 푹푹 빠졌다.
2016년 10월 최운산 장군의 후손들과 한국과 연변의 역사학자들이 봉오동 산에 있는 전투현장을 답사하고 후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대한군무도독부 본부가 있던 봉오동에 1.5m크기의 대형 맷돌이 지금도 남아있다.
김성녀 여사가 봉오동 독립군의 음식 준비를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대한군무도독부 본부가 있던 봉오동 중촌에 남아있는 대형 맷돌, 김성녀 여사가 독립군의 음식 준비를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