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봉오동전투의 숨은 수장,
최운산 장군(1885~1945)
異名: 만익(萬益), 문무(文武), 고려(高麗), 명길(明吉), 풍(豊), 빈(斌), 복(福)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은 우리나라 무장독립운동사의 숨은 영웅이다. 봉오동을 위시한 도문, 석현, 서대파, 십리평, 양수천자 등 10여개 지방을 소유한 대지주였으며, 러시아군에 소와 곡물을 대량으로 수출한 무역업자로 연해주 독립군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콩기름공장, 제면공장, 양조장, 두병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을 비롯한 여러 생필품 공장을 운영한 기업가였다.
봉오동은 함경북도 온성에서 두만강을 건너가면 바로 만나게 되는 강변지역이다. 최운산 장군은 이 일대의 거대한 토지를 소유했다.
함경북도 온성지역의 친척들과 동포들을 불러들여 북간도 왕청현에 신한촌 봉오동(鳳梧洞)을 건설한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을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전진기지로 만들었다. 마적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병부대를 운영하던 최운산 장군은 <봉오동무관학교>를 창설해 중국군에서 데려온 100여 명의 사병과 독립군이 되기 위해 모여온 애국청년들을 훈련시켜 독립군부대를 조직했다. 독립군의 수가 계속 늘어나 수백 명에 이르자 1915년 봉오동 숲을 벌목해 대형 연병장을 만들고 베어낸 나무로 세 동의 대형 막사t를 지어 독립군을 양성했다. 최운산 장군은 이 모든 군자금을 자비로 조달했다. 최운산 장군과 형제들은 1919년 3월 26일 왕청현 백초구에서 1500명, 5월18일 양수천자에서 수백 명을 모아 독립선언식을 개최하는 등 북간도지역 3.1 독립선언을 주도했다.
1919.3.26 왕청현 백초구에서 최진동 최운산 형제가 주최한 독립선언식에 대해 보고한 일제 문서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최운산 장군은 자신이 훈련 양성한 600여명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도독부>를 대한민국 최초의 부대, <대한군무도독부>로 재창설했다. 최운산 장군과 형제들이 대한군무도독부의 주축이 되어, 형 최진동 장군은 중국군에서 사임하고 사령관에 취임하였고 최운산 장군은 참모장에 동생 최치흥 장군은 작전참모로서 대한군무도독부를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식량, 무기, 군자금을 모두 지원하여 자신의 소유지 왕청현 서대파에 서일과 더불어 <북로군정서>를 창설하였고 왕청현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건립했다. 최운산의 자금력과 서일의 조직력이 북로군정서의 바탕이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원년”을 선포하자 최운산 장군은 석현의 대규모 토지를 5만원(현재가치 약 150억원)에 매각하고 독립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차대전 종료로 귀국하던 체코군단의 무기를 구입해 봉오동에 결집한 독립군을 무장시켰다. 봉오동에 모인 독립군은 최운산의 자금력과 인적 네트워크 덕분에 러시아군과 체코군에서 신식무기를 계속 사들여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완전무장하고 일본군대를 대파할 수 있었다. 수십 년 독립운동 기간 내내 간도 지역에서 최운산 장군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은 독립운동단체나 애국지사가 거의 없었다.
지명이 표시된 지역이 모두 최운산 장군 소유했던 지역으로 직선거리만 수십km에 이른다. 최운산 장군이 봉오동에서 멀지 않은 자신의
소유지 서대파에 북로군정서를, 십리평에 사관연성소를 창설해 군자금을 제공하고 운영을 지원했다.
1920년 3월부터 6월까지 최운산 장군은 대한군무도독부를 이끌고 독립전쟁 전략의 일환으로 수십 차례(일제문서 36회, 독립신문 72회) 국내진공작전을 펼쳐 온성, 종성, 회령 등 두만강변의 국경수비대와 헌병대를 공격했다. 또한 최운산 장군은 다가온 독립전쟁을 앞두고 북간도의 무장독립군 단체의 통합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1920년 5월 최운산 장군이 무기와 식량, 군복 등 군자금 일체를 책임진다는 합의하에 북간도 무장단체들이 전격적으로 <대한북로독군부>(총사령관 최진동)에 통합되었다.
일본군은 최운산 장군의 예상대로 6월 7일 대규모 토벌대를 조직해 중국 국경을 침범해서 북간도 무장독립군들의 근거지 봉오동으로 공격해왔다. 그러나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일본군보다 성능이 좋은 신형무기를 구입하고 5월에 봉오동 산위에 참호를 구축해 매복전을 준비하는 등 전쟁준비를 완벽하게 했다. 최운산 장군과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해 “봉오동 독립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910년 한일병탄 직후에 무장독립군부대를 창설해 훈련 양성하며 지속적으로 독립군 세력을 확대시킨 최운산 장군의 오랜 노력이 역사적 결실을 거둔 것이다. 1920년 6월과 10월,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의 승리는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독립의지를 천명한 민족자결의 빛나는 표상이 되었다. 이후 자유시참변을 겪으며 북간도 독립군의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최운산 장군과 형제들은 연해주와 북만주에서 계속해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일제에 체포된 최운산(최문무)1925년 4월 10일 매일신보
“무장단의 괴수(魁首), 8년 징역에 불복항소”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전투, 라자구전투, 대황구전투, 도문대안전투, 안산리전투, 대전자령전투를 비롯한 다수의 무장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연변박물관에서 만난 최운산 장군
일생 동안 무장투쟁에 모든 재산을 소진하고 1945년 7월 5일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한 최운산 장군은 모두 여섯 차례의 옥고와 모진 고문을 치르면서도 뒤로 물러섬 없이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투쟁에 평생을 바쳤다. 최운산 장군은 시대를 뛰어넘은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본이다.
연변박물관에 전시된 최운산 장군 족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