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독립전쟁 바로알기
봉오동 독립전쟁은 승전일인 6월 7일 하루의 전투가 아니라 1920년 6월4일부터 6월7일까지 봉오동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흘간의 전투를 모두 포함한 전쟁이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봉오동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군대, <대한군무도독부>가 창설되었다. 대한군무도독부 독립군은 최운산 장군이 중국군에서 나올 때 데리고 나온 병사들을 중심으로 10여 년 간 훈련된 신식무기로 무장한 정예 병사들이었다. 중국 동북삼성 군벌들 간의 전투에 참전했던 경험을 비롯해 실전 경험이 많은 군인들이었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했다. 최운산 장군과 형제들은 봉오동 독립군의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등 한국의 독립을 위해 오랫동안 독립전쟁을 예비하고 준비해왔었다. 최운산 장군과 형제들이 이끄는 <대한군무도독부> 독립군은 1920년 3월부터 봉오동 전투까지 독립전쟁 전략의 일환으로 온성, 종성, 회령 등 두만강 건너 일본군 국경수비대와 헌병대를 파괴하는 '국내진공전'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일본군은 북간도 독립군 중 대한군무도독부가 '무력침공이 가장 빈번'했으며 1920년 3~6월 국내진공작전의 대부분은 대한군무도독부가 감행한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일본군보다 우수했던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의 무기
일제 소총 사거리 550m
독립군 모신나강 사거리 750m
대한군무도독부의 국내진공전의 목적은 일본의 통치 질서를 교란하고, 국경 지역의 불안정을 증가시키며,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고양시키기 위함이었다. 더불어 일본군을 공격해서 무기와 전리품을 얻고 일본군의 군사작전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최운산 장군은 다가오는 독립전쟁을 대비해서 북간도의 무장독립군 통합을 서두르고 자신의 땅을 팔아 통합을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고 북간도의 무장단체들과 더불어 무장단체통합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를 이어나갔다. 마침내 5월 19일 최운산 장군이 무기와 군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봉오동에 '대한북로독군부'가 창설되었다. <대한국민회>를 비롯하여 <광복단>, <의군단>, <신민단>, <맹호단>을 비롯한 북간도의 독립군부대들이 통합되었고 최운산 장군의 실형인 최진동 장군이 독군부장이자 최고사령관으로서 대한북로독군부를 이끌게 되었다.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병력은 수천에 이르렀다. 김성녀 여사는 수천 독립군의 식사준비와 군복 제작을 위해 병참을 맡았다.
김성녀 여사가 60대인 1960년 대 초에 찍은 사진
대한국로독군부 독립군을 먹이고 입힌 병참대장 김성녀 여사. 봉오동 부녀자들을 이끌고 8대~10대의 재봉틀로 군복을 만들었다. 독립군들이 본부 근처에 집결할 때는 한 끼에 3000명의 식사를 준비했다.
최운산 장군은 일본군사령부가 증가 일로에 있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감수하면서 중국 국경을 넘어와 독립군기지를 공격하려는 작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이제 독립전쟁은 반드시 승리해야하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대한북로독군부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과 최운산 장군 그리고 참모들은 필승을 위한 면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봉오동 독립전쟁 발발 보름 전에 봉오동 주민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대피시키고 일본군과의 결전에 대비했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상보오동 삼개골에서 일분군을 일망타진하는 매복전술을 수립했다. 그리고 이 작전의 시작이 강양동 국내진공전이었다.
'신민단'으로 알려진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 부대는 6월 4일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 강양동 국경수비대를 공격한 뒤 두만강 건너 삼둔자로 철수해 일본군의 움직임을 감시했다. 독립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즉각 대응하지 않고 두만강변 하탄동 19사단 등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키며 봉오동 공격을 준비했다. 이틀 동안의 준비를 끝낸 일본군은 6월 6일 삼둔자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과 교전을 시작했다. 대한북로독군부가 예상한 대로 일본군은 먼저 공격한 독립군을 추격한다는 구실로 중국국경을 넘으며 독립군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봉오동으로 후퇴하는 척하면서 일본군을 유인했다. 19사단과 남양수비대 두 개로 나눠서 국경을 넘어온 일본군은 봉오동으로 향하는 중간에 위치한 안산에서 합쳐졌고 이를 확인한 독군부 독립군은 안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후 다시 봉오동으로 후퇴하면서 일본군을 유인했다. 일본군은 6월 7일에 고려령을 넘어 독립군 사령부가 있다고 생각한 작전지역인 봉오동 중촌 마을로 진군했다. 그러나 대한북로독군부 최고사령관 최진동 장군과 최운산 장군은 이미 일본군의 전술을 꿰뚫고 있었고 모든 독립군 부대들은 중촌마을을 완벽하게 비우고 상촌 삼개골을 둘러싼 산들에 참호를 파고 매복해서 일본군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독립군 사령부가 있다고 알고 있던 중촌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독립군들이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군사기지를 버리고 이미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고 오판했다. 일본군은 지름길인 비파동을 거쳐 퇴각할 것을 결정하고 상촌 방향으로 진군했다. 최진동 장군과 최운산 장군이 예상했던 그대로 대규모 일본군은 독립군들이 매복해 있는 상촌을 향해 진군하면서 대한북로독부 작전에 완전히 걸려들었다. 일본군의 후미가 독립군의 매복 지점을 통과하자 봉초봉에서 이를 지켜보던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의 공격개시 총성이 울렸다. 산을 울리는 총소리와 함께 집중 공격이 시작되었다.
2017년 8월, 역사학자들과 역사교사들이 봉오동 독립군이 매복했던 참호에 발을 담기고 기념촬영을 했다. 아래로 일본군이 지나갔던 길이 내려다보인다.
봉오동 산 지형에 따라 구부러진 형태의 또 다른 참호. 아래 내려다보이는 길을 주시할 수 있는 위치다.
6월 7일 낮 12시 20분 봉오동 상촌에서 시작된 전투에서 대한북로독군부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서쪽 산에 있던 독립군 매복부대가 작전과는 다르게 서둘러 퇴각하면서 삼면을 둘러싼 매복전술에 차질이 생기고 독립군은 일시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빠졌다. 그런데 오후 4시 반쯤 갑자기 날씨가 급변하며 앞을 분간할 없을 정도의 폭우와 큰 우박이 떨어지면서 일본군이 혼란에 빠졌다. 전의를 상실할 정도로 타격을 입은 일본군은 퇴각을 결정했다. 날씨 또한 우리 독립군의 편이었다. 일본군은 봉오동전투 보고서에서 독립군이 있던 고지에 도달하기 위해 '피부가 찢어지고 살이 베어지는' 추위와 고통을 견디며 폭우와 우박을 뚫고 치열하게 싸웠다고 썼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주는 한 부분이다.
최운산 장군은 일본군이 후퇴하고 있는 비파동 방향으로 또다른 일본군 지원부대가 진격하는 것을 탐지했다. 총사령관 최진동 장군은 2중대를 이끌었던 강상모 장군에게 서로 마주보고 진군하는 일본군을 양쪽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상대가 보이지 않는 빗속에서 일본군끼리 총격을 주고받게 하는 전술로 일본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3일간의 전투에서 대한북로독군부 독립군은 압승을 거두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사격술과 무기보유 상황 등 전투력에 대해 보고하면서 독립군이 정규 군대의 편제를 유지한 정예 군인이라는 사실을 놀라워하고 있다.
1920년 독립신문에 실린 임시정부 군무부 승첩에는 일본군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와 전투에 참가했던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회상록에는 봉오동 독립전쟁에서 일본군 수백 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군 사망 500여 명이라는 홍범도일지의 기록과 동일하다.
그동안 봉오동 독립전쟁은 홍범도 개인을 부각시키는 영웅담으로 포장되었고 장대한 북간도 독립전쟁의 대서사는 게릴라전과 같이 축소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봉오동전투에 대한 연구와 서술에는 여러 문제점과 한계가 있다. 봉오동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한북로독군부는 '대한독립군'으로 대체되어 서술되고 있고, 연대장이었던 홍범도 장군은 사령관으로 뒤바뀌어 있다. 봉오동 독립전쟁은 오랜 시간 준비를 통해 완전 무장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치밀한 전략전술로 대규모 일본군을 압도적으로 물리친 승리의 역사로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1920년 임시정부가 독립신문에 발표한 봉오동과 청산리 독립전쟁 기록
1920년 독립신문에 실린 임시정부 군무부 승첩에는 일본군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증언한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는 사망 500여 명 중상 700여 명, 경상 1000여 명으로 기록했다. 이는 일본군 사망 500여 명이라는 홍범도일지의 기록과 동일하다.
전 재산을 바쳐 독립전쟁의 기틀을 마련하고 승리를 이끈 최운산 장군과 형제들의 역할과 그들과 함께 했던 수많은 독립군 선조들의 희생과 헌신을 제대로 인식하고 기억해야 한다.
봉오동전투 당시 일본군이 떨어뜨린 지휘도와 군모 등을 봉오동 산에서 동네주민들이 주워서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