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장군 연보
최운산 장군(1885~1945)
異名: 만익(萬益), 문무(文武), 고려(高麗), 명길(明吉), 풍(豊), 빈(斌), 복(福)
  • 1885
    • -11.17.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에서 연변 도태 최우삼과 전씨 이씨의 2남으로 출생. 아명 명길明吉.
      연길 국자가 서당에서 한학 修學해 중국어에 능통하고 어린 시절부터 무림고수에게 무술 연마.
  • 1907
    • -김성녀 여사와 혼인
      중국 동북삼성지역 지배세력인 장작림군에서 군사훈련 담당 간부로 활약, 중국군에서 최풍(崔豊)으로 불림.
      동북삼성지역 지적地籍정리 당시 왕청현 총대로 일하며 봉오동, 도문, 석현, 서대파, 십리평, 양수천자 등 왕청현 일대의 거대한 토지 소유.
  • 1908
    • -최운산 一家 4代 연길을 떠나 봉오동으로 이주. 신한촌 봉오동 건설
      콩기름공장·국수공장·제주공장·성냥공장·비누공장·과자공장을 비롯한 다양한 생필품 기업 및 대규모 목장 운영하고, 곡물 및 육우를 러시아군에 수출하는 등 다양한 경제 활동으로 북간도 제1의 거부로 성장
  • 1912
    • -마적으로부터 봉오동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100여 명 규모의 사병부대를 창설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해 <봉오동사관학교> 개교
  • 1915
    • -대규모 무장독립군기지 건설
      봉오동으로 모여드는 애국청년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자 봉오동 숲을 벌목 개간하여 3천평 규모의 연병장 건설하고 대형 막사 3동 건축해 독립군의 숙소 마련하고 <도독부> 본부 둘레에 대규모 토성(두께 1m)을 축조하고 성벽 네 귀퉁이에 대포 설치
  • 1919
    • -북간도 3.1 독립선언 주도함
      최운산 장군 형제들이 3.26‘왕청현 배초구 독립선언식’ (일제 경찰 추산 1,500명)와 5.18 ‘양수천자 독립선언식’(일제 경찰 추산 200명) 등 북간도 일대 독립선언식 주도하여 최운산 일가와 수천 명의 북간도 동포들이 기미년 독립선언식에 참여함.
    • -4월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 창설
      상해 임시정부 수립 후 최운산의 사병부대 <도독부>를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로 전환(사령관 최진동, 참모장 최운산, 참모 최치흥), 3형제가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에 투신
    • -서대파에 <대한북로군정서> 창설 - 총재 서일
      1911년부터 최운산의 소유지 서대파에 머물며 대종교를 중광한 동지 서일과 손잡고 주둔지와 무기·식량·군복을 비롯한 군자금을 제공해 <북로군정서>를 창설하고 운영을 지원함
  • 1920
    • -십리평에 <사관양성소> 설립 - 소장 김좌진
      3.1운동 이후 독립군 지원자가 늘어나 최운산의 소유지 십리평에 단기 독립군 양성기관 <사관연성소>를 설립해 무장독립군 양성함
    • -1월 최운산 소유 석현의 대규모 토지 5만원에 매각(체코군 무기 구입 자금)
      1월 ~ 5월 수시로 국내진공작전 전개하여 일본 헌병대 및 국경수비대 습격전 전개
      5월 19일 독립군 통합부대 〈대한북로독군부〉 창설. - 사령관 최진동
    • -북간도의 제 단체 독립군들이 봉오동에 모여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로 거듭난 배경에는 무기, 식량 군복 등 모든 군자금을 최운산이 책임진다는 약조가 있었음.
    • -6월 7일 봉오동 독립전쟁 대승
    • -10월 26 청산리 독립전쟁 대승
  • 1921
    • -6.28 자유시참변 당시 최운산 장군 휘하 부대를 이끌고 이동해 참변을 피함.
  • 1922
    • -최진동 장군과 함께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 참석함
  • 1924
    • -삼동지방 토지 구입 및 사관학교 설립
      새로운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해 동녕현의 토지를 구입하는 등 연해주와 북만주에 여러 곳에 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투쟁을 지속
  • 1924
    • -일본경찰서 습격과 군자금을 모연한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어 3년간 투옥 당함
  • 1925
    • -최문무 청진지방법원에서 8년 구형받고 경성 복심에 상고 중(1925년 4월 10일자 조선, 동아, 매일 3개 신문 보도)
  • 1926
    • -출옥 후 이름을 바꾸고 변장하여 신분을 숨기며 무장투쟁 재개
  • 1930
    • -도문대안전투·안산리전투·우수리강전투 등에서 戰功.
      1930년대에도 군자금을 담당하며 지속적으로 무장투쟁을 지휘.
  • 1933
    • -대전자령전투에서 大勝.
  • 1937
    • -보천보전투의 배후로 지목되어 獄苦
      실제 관련은 없었으나 모든 무장투쟁의 배후 세력으로 항상 감시 받음
      삼림지대인 대황구大荒區에 500여명 규모의 무장독립군부대 비밀리에 운영
  • 1939
    • -창씨개명 거부, 독립군 군자금을 조달한 불령선인으로 10개월간 투옥
  • 1940
    • -1940년대 중반까지 비밀리에 무장독립군 부대를 지속적으로 운영.
  • 1945
    • -7. 5 고문후유증으로 순국
  • 1977
    • -건국훈장 대통령표창 추서(1990. 건국훈장 애족장 승급)
  • 2016
    • -7월 4일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창립